[일본 신문 번역] 정신의학자가 바라본 신종 코로나 위기의 일본

2020. 4. 19. 00:00세계뉴스

반응형

 

전체적인 내용을 잘 읽어보시면 '멜랑콜리' 라는 책의 해설을 쓰고 있지만 '일본인'의 심리적 상태와 특징에 대해서 정말 잘 풀어 놓은 기사라는 걸 아실 수 있습니다.

 

원래는 요약해서 번역 하려고 했지만 쓰다보니 너무 잘 쓴 글이라 전문을 번역 합니다. (한번도 요약 번역을 한 적이 없기는 하지만...)

 

천천히 읽고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 보시면 한국 사회에도 시사점을 던져주는 글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결단'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일본을 포함한 세계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대가 되고 있는 중 '감염증 대책'과 '경제활동'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요청의 가운데 최적의 행동을 선택할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써 종합력이 요구되는 영역으로 여러 전문 지식의 집합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정신의학이 이런 상황에 공헌 가능한 것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실패가 일어나기 쉽다'라는 '정신 병리의 형태'를 제시하여 그것을 피하도록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일정의 이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번 기사를 쓰기로 했습니다.

 

-'멜랑꼴리' 로 부터의 배움

 

참조해야 하는 것은 '멜랑콜리'라고 하는 독일인이 쓴 책으로 그 내용에 대해서는 '꼼꼼하고 주변에 신경을 많이 쓰는,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성격의 사람에 대해 쓴 것' 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멜랑콜리'에는 인간의 심층에 대한 흥미가 정신의학의 중심이었던 시대의 최고 걸작 중 하나라고 불릴 정도의 작품으로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 하는 것으로 그것으로 부터 배울 점이 있습니다.

 

아주 두꺼운 저서이기는 하지만 그 책의 뒷 부분에는 환자가 궁지에 몰려서 결국 우울증이 발병하게 되는 전후의 모습이 적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환자는 자신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쉬는 것을 선택해 상태를 다시 회복 시키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를 고르게 되면 또 하나의 선택지로 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게되는 기분이 되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예를 들면 쉬는 것을 선택하게 되면 '어째서 일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내면의 목소리에 위협 받게 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계속 일하기로 한다고 하더라도 '어째서 쉬지 않는 것인가'라는 목소리가 들리며 쉴 기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결단 하는 것이 되지 못 하고 시간만 질질 끌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과 노력을 그냥 보내면서 최종적으로는 우울증이 발병하게 된다고 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 라는 것에 대해서 '멜랑콜리'의 저자는 확실하게 쓰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 이유의 하나로써'집단의 공기에 맞추는 결단만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복수의 축이 존재하는 가운데 자신다운 결단을 내리는 것에 있어서 지적, 심리적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자는 '계속 일하는 것을 권유하는' 사람들의 일원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기대를 배신하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동시에 '쉬는 것을 권유하는' 사람들의 일원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기대를 배신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멜랑콜리'의 저자는 이런 상황에 빠져 있는 환자의 사앹를 '동시에 두 개의 지점에 있으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면 '한 사람의 연속적인 개인으로써 책임 있는 선택을 한 적이 거의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야 말로 일본인의 특징.... )

 

그러나 본인은 '주위에 맞추는 상냥함과 책임감'이라는 자신의 선량함을 어디선가 느끼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음의 순간에는 그런 자신에 나르시시스트적인 만족을 느끼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강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내면에서의 활발한 자기 부정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현실의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결국 소홀하게 됩니다.

 

- 멜랑콜리 친화형 이란?

 

 

이런 퍼스낼러티를 '멜랑콜리 친화형'이라고 부르지만 위에서 이야기 한 것 같은 약점은 보통 감춰져 있어서 노출 되지 않고 있습니다.

 

'결단'을 하지 않더라도 좋은 상황을 자신의 평소부터 주변에 잘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의 방책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주위에 자신의 감성을 받아주는 영역을 만들 것'입니다.

 

중시되는 판단축은 '진짜인가 가짜인가'가 아니라 '가까운가 먼가' 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이상화하여 확실한 경계를 마음속에 만들고 있습니다. 그 경계의 내부에 있는 것은 '올바르고 깨끗한 것'으로 무조건 받아들여 집니다. 역으로 그 경계의 밖에는 '틀리고 더러운 것' 입니다. =

 

이것의 말을 달리 하면 '유아적'으로써 '전근대적'인 심성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근대적'인 관점으로 부터는 비판 받을 것이지만 이 심성이 뿌리 깊으며 얕잡아 볼수 없다는 것은 실생활에서 자신이 강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멜랑콜리 친화형'을 단순하게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퍼스낼러티'라고 이해하는 것은 부정확한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그런 논의가 주로 유행한 것이 (현재도 유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로 독일과 일본이었다는 것에서 부터 '조금 늦게 근대화를 했던 나라에서 일어나기 쉬운 퍼스낼러티의 문제'라고 하는 의견이 있어서 필자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직전에 쓴 것처럼 '자신의 영역을 만들고 그 안에 동료들만을 절대시하는' 태세는 근대사회가 앞에 내세우는 원리원칙으로 부터 강하게 비판 받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천천히 근대화를 이룩해온 나라는 하나하나의 과제에 꾸준하게 매달려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둘러서 근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나라에서는 '겉과 속'을 나누어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내측의 동료'만을 중시하는 심성의 뿌리를 '뒤'에 숨기고 '겉'에는 과도한 근대적인 이념을 반동형성적인 동일화를 해보입니다. 그런 마음의 분열을 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어렵게 써 놓았던데 쉽게 말하면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것입니다. 속은 완전히 근대화 되지 않았는데 겉모습만 근대화 되었다는 뜻.)

 

멜랑콜리 친화성의 두 번째 방책은 '언제나 자신이 나쁘다고 자책하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모습과 비교하여 언제나 항상 자신을 열등하다'라고 느끼면서 자기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근면하게 달리게 하는 것입니다만 중요한 '어떤 방향으로 근면하게 나아갈 것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책임을 느끼는 프로세스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결국, 주위의 공기와 일치하여 가능하다면 그 안에서 우위성의 확보가 중요한 것으로 그것이 충족되지 않은 경우 '무턱대고 자책을 한다' 라고 내면의 프로세스가 소동을 일으켜 버립니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모델이 있고 그것에 미달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경우 사회를 탓하거나 나의 노력을 방향, 노력의 강도 등을 되돌아 보는 것이 아니라

 

일단 '나'의 모습을 자책하고 끊임 없이 괴로워 한다는 뜻인 듯 합니다. 그야말로 일본인들이 자주 보이는 모습이네요. )

 

 

- 분열이 강화된 일본사회

 

 

첫번째와 두번째는

 

'(가족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찬성한다' 라는 것과 '무엇이라도 반대한다'는 것으로 정반대의 것이기는

하지만 어느쪽도 '갈등과 마주하여 자신만의 결론을 낸다'는 것을 회피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생각해보면 일본이 풍족하고 여유가 있는 시기에 하나하나의 갈등에 확실히 마주하면서 그 마음의 분열을 해소하는 듯한 활동을 좀 더 활발하게 했다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 외국을 보아도 그렇게 까지 잘 되고 있는 듯하게 보이지는 않기 때문에 그것은 너무 많이 바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최근 수십년을 되돌아보면 일본사회는 여러 갈등과 마주 보는 것을 피하고 뒤로 미루는 것을 계속 하면서 이 분열을 해소하기 보다는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내/외'의 경계를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그 영역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과도한 비판과 전면부정의 경향도 강화되고만 있습니다.

 

(내외의 구분은 일본과 외국의 구분, 일본인과 외국인의 구분이며 과도한 비판과 전면 부정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 취하는 혐한의 태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그 안에 품고 있는 소수자들, 재일한국인이나 조선학교, 후쿠시마 난민들, 일본의 홈리스들, PC방 난민들 등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일본 사회가 취하고 있는 태도에 서 잘 볼 수 있습니다.)

 

- 일본 비판을 해온 개인적인 반성

 

저 자신은 일본 비판을 강하게 해왔다고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만의 퍼스낼러티의 분열을 넘어서기 위한 행동으로 어떤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너무 강한 비판에는 분열을 강화시니는 부작용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근대와 전근대'라는 형태로 문제를 설정한다면 '근대'와 '전근대'의 어느 요소를 우선할 것인가 라는 대립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민주주의'나 '자연과학'처럼 근대사회의 이념은 현실에는 없는 장래에 달성해야만 하는 '유토피아'의 구성으로써 만들어 졌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현실의 인간들이 보이는 행동은 항상 '근대적인 것과 전근대적인 것'이 섞여 있습니다. 즉, '민주주의적인 것과 촌락사회적인 것' '과학적인것과 미신적인것'이 섞여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농도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근대가 전근대를 비판하는 또는 전근대가 근대에 반발하는 것이 강조 되기 보다는 현상을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 '좀 더 훌륭한 것을 목표로 한다' 라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은 아주 어려운 문제로 우리들에게 닥쳐왔습니다.

 

이런 시대에 있어서 '내륜의 논리에 집착해 외부를 배제한다' '과도한 이념에 동일화 되어 현상을 지나치게 부정한다'라는 반대의 양극에 대한 두 개의 함정에 주의하면서 현실을 확실하게 바라보면서 각각의 개인 부터 스스로의 결단을 쌓아올려 나가는 것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책임감 있는 개인이 연대해 나가는 것이 바탕이 되고 난 다음에 그곳에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말을 어렵게 돌려 쓰고 있는데 쉽게 바꾸면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일어나고 있는 일본 내부의 과도한 공포와 그로 인한 각종 차별에 대해서 스스로 정보를 찾고 생각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거리 트럭 운전사, 의료진, 감염이 발생한 학교의 학생 등에 대한 차별과 괴롭힘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조심하고 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때 지금의 일본사회가 보이고 있는 패닉이 진정되고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는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그런 연대를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하는 것인가?' 라고 되 묻는 다면 어떨까요.

정부의 역할은 어디로 간 것인가? 일본 사회의 정부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결국 이 글도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기 무서워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글이라 한계가 뚜렷합니다.)

 

-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그런데 이번의 문장에서 요구되고 있는 '갈등과 마주하여 자신만의 결단을 쌓아올려 가는 것'은 어느 정도 축복받은 환경에 둘러쌓인 사람들에 대해서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정 때문에 자신만의 결단을 내릴 수 없게 된 사람도 적지않습니다. 그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상황이 달라진다면 자신의 과제에 몰입하여 해결 할 것이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갈등과 마주 할수 없는 것에 대해서 이해와 공감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멜랑콜리'의 후반에 씌여 있는 것 처럼 우울증의 발병으로 인해 '쉬는 결단도 일하는 결단도 스스로 할 수 없는' 환자는 '애초부터 자신의 책임으로 결단을 하는 것을 회피하는 결과'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라고 공격하는 것은 임상 현장에서는 피해야할 일입니다.

 

그것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는 경우에노 상태가 안정된 후에 이야기 하는 것이 가능한 화제입니다.

 

우울증 임상에 절박한 현장에서는 환자가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를 '이미 병증의 발현이 시작된 것으로 뇌의 기능 일부가 저하되고 있다. 그 결과 생각 할 수 없게 된 것' 이라고 이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정당한 권위 하에서 '쉬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설득하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1 대 1로써 설득하는 것이 어려운 경우에는 허가를 얻어서 가족과 직장의 상사 등에게 연락을 취하여 모두 쉬도록 설득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쉰다고 하더라도 생활에 지장이 있지 않도록 설명을 회사의 관계자들에게도 해야합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피폐하여 시야협착을 일으키고 있는 경우에 자신을 대신하여 확실한 판단을 해줄 정당한 권위가 사회에 기능하면서 그것에 의존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필요한 때에는 확실히 의존 가능한 것'이 '독립된 결단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결단'이 중요하게 다뤄진다면 이후에는 사람을 '의존 할 수 없도록 몰아넣는 것'으로 독립된 결단을 내리도록 강제하는 것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에도 여러 위기나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의 일본 사회가 개인의 정당한 의사 결정을 위해 의존 가능한, 건전한 사회가 아님을 돌려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말을 어렵게 해서 야후 댓글을 보면 못 알아 듣는 사람들이 많던데 현재 일본의 사회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주 어려운 단어와 비유를 사용해서 돌려 까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의 사회가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차별과 배제가 일상화 되어 있으며 분열된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개인들은 독자적인 생각으로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이며 그 때문에 사회적 권위에 의지해서 판단을 위한 도움을 얻고 싶어도 정부 뿐만 아니라 미디어등의 권위가 전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 하고 있습니다.

해설 하기도 힘드네요 ㅜㅜ 어렵게 글쓰는거 정말 싫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