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신문 번역]'정책이 없는 아베 정권'을 지금도 계속 지지 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

2020. 4. 21. 00:00세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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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깊은 통찰로 현상을 분석하는 신문 기사는 인기가 없습니다. 차라리 가벼운 연예계 기사를 번역해 올리는 편이 조회수도 많이 나오고 방문객도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누군가 한명이라도 이런 좋은 글을 읽고 깊은 생각을 해 준다고 생각하면 조금 이나마 사명감을 가지고 번역을 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번역해 보겠습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쇼크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은 '원숭이화(サル化)'의 한가지 예시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만 괜찮다면'이라고 생각하는 '원숭이'로 부터 벗어나 장기적 시선으로 생각하는 시간 관념을 가지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

 

(용어 설명 : 사반기는 회계 년도 1사분기~4사분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 ◆ ◆

 

원숭이화 하는 세계

 

 

 

'원숭이화 하는 세계'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런 타이틀로 한 것은 이 사반세기 정도로 일본인의 생각하는 방식이 확실히 바뀌어 버린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다른 생물로 바뀌었다고 할까 새로운 단계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변화하여 그것에 따라 인간의 의식도 변화한 것입니다. 가장 변화한 것은 인간의 시간 의식입니다.

 

제가 태어난 1950년의 일본 노동 인구의 50%는 농업종사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고 '농업적인 시간' '농사 달력' 을 호흡하며 살아갔습니다. 아침 해와 함께 일어나 해가 떨어지면 잠을 잡니다. 봄에는 씨를 뿌리고 일조량, 냉해피해, 풍수해, 병충해를 두려워하면서 무사히 가을을 맞이한다면 수확을 합니다....

 

그런 '농업적인 시간'의 가운데서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일본인 시간의식의 토대를 이루었습니다.

 

-회사의 '바람직한 모습' 보다 이번 기의 숫자가 우선한다

 

저자인 우치타 테츠루

 

하지만 그것이 70년 지나면서 산업구조화가 고차화 하면서 그것에 따라 일본인의 시간 의식도 그 시대에 지배적인 산업 구조에 맞게 변화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글로벌 스케일로 전개하는 금융자본주의의 '거래의 시간'에 인간쪽이 적응순화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금융상품의 거래는 1000분의 1초 단위로 알고리즘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영자들은 이번기보다 앞선 일들을 생각하지 않게 되어습니다. 생각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수악이 악화하여 주가가 내려간다면 앞이 없기 때문입니다.

 

10년후, 20년후의 회사의 '바람직한 모습' 보다 이번 기의 숫자가 우선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의 설립의도는 무엇이었나 라는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업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조급한 시간에 익숙해진 사람이니까 긴 시간을 생각하여 자신의 행동의 적부를 판단하는 습관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특별히 머리가 나빠졌다거나 인간성이 열화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간의식이 환경에 적응하여 변화한 것 뿐입니다.

 

1000분의 1초의 세계에 현실감을 느끼는 인간은 더 이상 '농업적 시간'을 일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만 좋다면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되던 알게 무엇인가

출처 입력

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 길이로 밖에 생각을 할 수 없다는 쪼그라든 시간 의식에 익숙해진다면 더 이상 인간적인 성숙이라는 것은 바랄 수 없게 됩니다.

 

'자기 도야' 라는 것은 긴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자신을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과거를 뒤돌아 보면서 미래의 바라보며 지금 이곳에서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숙려합니다. 좀 더 성숙한 사람은 '세계의 시작' 부터 '세계의 끝'에 다하는 광범위한 우주적 시간의 가운데 자신을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의 일생이 순간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 자신의 답파 할 수 있는 공간이 아주 작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자각하여 한 없이 작은 자신을 깨닫고 자신은 지금 이곳에서 자신은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시간 의식이 사반기에 이르기까지 줄어든 인간에게는 무리입니다. '농업적인 시간' 마저 실감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우주적 시간'이 실감 할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도야'라는 언어 그 자체가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습니다.

 

도기를 굽고 금속을 주조하는 것 같은 느긋한 시간을 지나 그에 따라 모양을 만들면서 자신을 돌아 보는 시간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조삼모사'의 고사가 알려주는 것 처럼 줄어든 시간 의식의 안에서 사는 사람은 '아침의 자신'이 '저녁의 자신'과 동일하다는 실감이 없습니다.

 

'지금만 좋다면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되던 상관 없다'라는 찰나주의에 빠져 '이런 것을 언제까지고 계속하게 된다면 언젠가 위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알고 있어도 '언젠가'에 현실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것'을 질질 끌게 됩니다. 그런 경향을 나는 '원숭이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코로나 재앙에서 보인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지 않는 일본인

출처 입력

일본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재앙에 대한 대책이 우왕좌왕 하고 있는 것은 '원숭이화'의 좋은 예시 입니다. 위기 관리에 필요한 것은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힘과 미래의 리스크를 상상하는 힘입니다. 과거의 사례를 뒤돌아 보면서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고칠 점은 고칩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여 그 피해를 최소화 하는 수단을 강구합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 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에 생생한 현실감을 느끼는 감수성이 없으면 위기 관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인은 그것이 안 됩니다. 과거의 실패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고 거기서 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사태에는 대비하지 않습니다.

 

플랜 A 가 실패한 경우 플랜 B, 플랜 C를 생각하는 것을 하지 않습니다.'참모본부가 입안한 작전이 전부 성공한다면 황군은 대승리' 라는 노몬한, 임팔 이래의 멘탈리티로 부터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최악의 사태'를 상정해서 어떤 경우에 어떻게 해서 피해를 최소하 하는가 라는 의논을 시작하면 '재수 없는 건 하지 마라' 라고 차단해 버립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비관적이 되어서 의기소침하게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다는 발상 그 자체가 '패배주의'로써 공격당합니다.'패배주의자가 패배를 불러왔다'라고 혐오 당합니다. 나는 무도가 이기 때문에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습성입니다만 일본사회에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 코로나는 세계 각국에 배포된 '센터시험'

 

이번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판데믹은 '센터시험' 같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재앙에 어떻게 적적하게 대응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세계 각국에 동시에 배포 되었습니다. 아직 아무도 정답을 모릅니다. 조건은 동일합니다. 다른 문제라면 외교에서도 재정에서도 교육과 의료에서도 나라 마다 품고 있는 문제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간단하게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판데믹은 다릅니다. 모든 나라가 같은 조건으로 적절한 대응이 요구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지금 대만, 한국, 중국이 감염확대를 저지하는 것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감염 확대를 막을 수 있다.'라는 교훈을 제시했습니다. 도시 봉쇄, 감염자의 완전 격리, 개인 정보의 개시와 절저한 검사.... 등 각각의 방식은 다르지만 어쨌거나 거의 확산을 막았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은 어느 하나도 성공하지 못 했습니다. 세계에 '이렇게 하면 막을 수 있다.'라고 보고 가능한 성과가 하나도 없습니다.

 

운 좋게도 일본은 심각한 감염 폭발에는 도달하지 못 했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방역정책의 '성과'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검사수를 막고 있는 것 만으로 사실은 감염의 실태를 정부도 파악하고 있지 못 하다는 의혹을 해외의 미디어들로 부터 받고 있습니다만 정부는 그것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 한국과 중국에 배울 수 없는 아베 정권

 

한국과 일본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감염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은 종식을 논할 정도로 수그러 들었으며 '이렇게 하면 괜찮다'라는 경험치를 쌓아 올렸습니다. 일본에서는 심각한 감염폭발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지만 그것을 억제하는 수단을 취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글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감염 폭발이 일어남)

 

조령모개적인 지시를 발표하면서 '무언가 하고 있는 느낌'을 연출하고 있을 뿐입니다. 국내 미디어들은 그래도 그것을 옹호하며 지원사격 해주겠지만 해외 미디어들은 가차 없습니다.

 

각 나라들은 선행하는 성공사례에 배우고자 하고 있습니다.

 

어디라도 중국의 도시 봉쇄와 한국 대만이 실시한 완전격리, 검사체제의 충실이라는 성공례를 '해답'으로 보고 흉내 내기 시작했습니다. 판데믹에 대해서는 '컨닝'은 없습니다. 흉내낸다고 하더라도 성공 사례는 무엇이라도 따라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를 위해서 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것이 안 되고 있습니다.아베 정권의 코어 지지층은 혐한, 혐중을 외치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한국, 중국의 성공례를 흉내내는 것은 '한중의 밑에 서는 것'이며 아베 정권의 지지층에게 있어서 견디기 어려운 굴욕입니다.그러므로 정부는 그 지지층을 배려하며 '일본 독자'의 감염방지책을 실시 하는 것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일본정부에는 없습니다.

 

 

- 코로나 대응에 명암이 갈린 미국과 중국

 

판데믹이라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서 감염증대책에 예산을 쏟아 붓는다면 '일본독자'의 방역대책을 제언 할 수 있는 체제가 만들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한다'는 것은 패배주의 이기 때문에 일본판 CDC(질변관리예방센터)도 결국 만들어지지 않은채 이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코로나 바이러스 재앙이 끝나고 난 뒤에 일본은 방역 대첵에서 '선진국에서 최저점'에 가까운 평가를 각오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연한 불운이 아니라 일본인의 '최악의 사태에 대비 하지 않는' 경향이 불러온 필연적인 귀결 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재앙에 트럼프 대통령도 그 위기 관리력의 부재를 드러냈습니다.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에 의해 국제협조에 등을 돌려온 미국 입니다만 이번의 코로나 재앙에서도 트럼프는 '아메리카만 괜찮다면 그걸로 괜찮은것이다.' 라는 자국제일주의를 드러내며 가을의 대통령선거에 대비해 지지자에 대해서 어필을 우선하며 국제사회에 대해서 지도적 메세지를 발표하는 임무를 방기해버렸습니다.

 

그 한편으로는 감염대책에 대해서 경험치를 쌓아온 중국은 의료자원을 세계각국에 보내고 있습니다. 감염증이 종식한 시기에 세계의 많은 나라가 '아메리카와 유럽의 나라들이 자국제일주의에 빠져 있는 가운데 중국 만이 지원의 손을 내밀어 주었다.'라는 인상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진핑은 코로나 재앙을 통해 '중국은 관대하고 우호적인 대국'이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선포하는 것을 목표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도 적극적으로 타국에 지원을 보내는 것으로 국제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의도는 분명 있지만 행위 그 자체는 인도적 입니다. 트럼프는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코로나 대응에만 신경써서 아메리카가 얼마나 국제적 위신을 잃고 있는지는 신경쓰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째서 이렇게 무능무책한 정권이 40%가 넘는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것일까요? 이데올로기적으로 아베정권을 지지하고 있는 사람은 자민당 지지층의 절반 이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지지자들은 무엇을 지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아저씨도 이 악물고 한국 이야기는 안함.

 

위에 살짝 언급하기는 했지만 한국이 외신을 통해 높은 평가를 받고

 

세계 각국에 인도적 지원을 하면서 국제 지위가 향상 되고 있는건 결국 이 아저씨도 한국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자신이 쓴 글로 증명하게 되었다.)

 

- 자신 보다 '상위'의 사람을 비판하면 안 된다는 풍조

 

여론 조사에서는 자주 '다른 사람이 없으니까'라는 것이 지지 이유의 제1위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아베신조가 총리대신에 적격한 것은 현재 총리대신 이기 때문에' 라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컬럼니스트인 오다지마 타카시씨가 전에 트위터에 아소 다로를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것은 자신이 재정대신이 되고 난 뒤에 말해라'라는 답변이 날아왔다고 합니다. 재정대신 이외에 재무대신의 정책과 자질의 적부에 대해서 논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사실 근 10년간 일본사회에 널리 퍼진 것입니다. 저도 정치에 대해서 의견을 말하면 '그러면 니가 국회의원에 입후보해라'라는 듯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이외에는 국정에 대해서 의논할 자격이 없는 듯 합니다. 같은 논리를 여기저기서 듣게 됩니다.

 

유튜버가 다른 사람의 콘텐츠를 비판하면 '팔로워 숫자가 비슷하게 되면 말해라!' 라고 말하며

인터넷에서 부자의 언동에 대해서 비판하면 '그 정도로 돈을 벌고나서 말 해라!'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집권자나 부유층을 비판하는 것은 같은 레벨의 권력자나 부유층에게만 허용된다는 불가사의한 논법이 만연해 있습니다.자신보다 '상위'의 인간을 비판하는 동기는 질투이며 선망입니다. 그렇게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인간의 비뚤어짐 입니다. 꼴 사나우니까 그만둬라- 라고.

 

그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절대적인 현상긍정'인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약자는 '신분을 알아라!' '분수를 알아라!' 라는 것입니다.

 

- '벚꽃을 보는 모임'의 어디가 나쁜건가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언어를 입에 담는것이 실제로는 돈도 없고 지위도 없고 사회적 약자인 것이 불가사의합니다.

 

'벚꽃을 보는 모임'의 문제에서도 총리대신의 자신의 지지자를 불러 세금으로 접대한 것의 어디가 나쁜 것인가? 라고 진심으로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괜찮지 않은가? 무엇이 나쁜 것인가? 권력자라는 것은 '무엇을 하더라도 처벌받지 않는 인간'이 아닌가?

 

법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지 않은가? 아베 신조는 권력자이기 때문에 무엇을 하더라도 처벌받지 않고 법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 위치에 서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하고 그 결과로써 권력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비판할 권리는 없다.

 

비판하고 싶다면 네가 아베신조의 포스트가 되어보라. 라는 논리가 현실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아키에 부인

 

 

- '신분을 알아라!'라는 '死語’가 되살아난 일본

 

저도 소년시대에는 '신분을 알아라!'라고 호통치는 어른이 아직까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도성장기를 경계로해서 이런 것을 말하는 어른은 싹 사라졌습니다.

 

당연합니다.

 

고도성장기라면 국민 전원이 '신분을 모르고' 욕망에 자신을 태우며 '분수를 보르고' 틀을 깨부수며 '몸에 맞지 않는' 일을 받아 들여 열심히 해냈습니다. 그것에 따라 경제 대국이 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국력이 향상되며 국운이 상승하는 때에 누구라도 '신분'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진공관을 만들던 동네공장이 헐리우드의 영화회사를 매수하고,

고베의 약국이 세계적 슈퍼가 되고

우도의 신사복점이 세계적인 의류 메이커가 되는 시대에

 

'신분을 알아라!' 라는 것은 사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어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국력이 저하하며 국운이 쇠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 현정권이 지지받는 이유는 '일본이 내리막길이기 때문'

 

인간은 파이가 커지고 있는 때에는 지배비율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자신의 파이가 전보다 커지고 있다면 그것에 만족합니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파이가 줄어들기 시작하면 태도가 변합니다. 옆의 인간이 가지고 가는 비율이 신경쓰입니다.

 

대체 어떤 기준으로 분배되고 있는 것일까? 검정기준을 개시하라! 등급을 측정한 증거를 내놓아라! 같은 말들이 나옵니다.

 

생산성이 어떤 사회적 유용성에 근거한 성과 어쩌고 운운 하는 것은 전부 '가난해지고 있는' '째째해지고 있는' 증거 입니다. '내리막길을 걷는 나라'에 나타나는 고유 현상입니다.

 

현정권이 지지받고 있는 것은 단적으로 일본이 내리막길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사람들은 옆집 사람의 '신분을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는데 열심히지만 창의적으로 무언가 이루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옆 사람이 젓가락을 올리는 것 내리는 것에 시끄럽게 참견을 하는 것은 한정된 자원을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풍족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지금은 배가 가라앉고 있는 때입니다.

 

선적된 물건의 분배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을 여유따위는 없습니다. 이 배의 밑바닥 어딘가에는 지금 커다란 구멍이 나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구멍을 막는것이 최우선입니다. 그를 위해서 남은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内田 樹/週刊文春 2020年4月9日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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